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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화요일-나는 카메라를 사기 위해 이런 짓까지 했다

가족용 카메라 구입에 대한 예산 투자 요청.



발제자 정서영

  

  가족 여러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해를 보내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때이기도 한 요즘, 다들 잘 지내고 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한 해를 맞아 저도 새로운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바로 가족용 카메라 마련입니다. 부모님도 아시다시피 저와 동생이 어렸을 때만 해도 집에 가족용 카메라가 있었고, 그 카메라로 우리 가족의 추억을 담고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카메라가 노후되면서 가족들의 사진을 담을 기회가 점점 적어졌고, 급기야 집에 있던 니콘 카메라가 사망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의 추억을 담을 사진기는 아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가족들 중 사진에 그나마 관심이 있는 저의 핸드폰은 벌써 3년이 넘는 세월을 저와 함께 하느라 지금은 요양원에 들어가야 할 판입니다. 처음 살 때는 좋아 보였던 카메라 기능 또한 핸드폰이 가지고 있는 카메라 센서의 한계로 인해 흐릿해지고만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연로한 황희 정승이 낙향하는 것을 반대하여 죽을 때까지 부려먹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황희 정승의 업무력이 젊을 때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불쌍한 핸드폰은 날이 갈수록 시름시름 앓고만 있으며 저는 이 충실한 친구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을 이미 여러 번 하였습니다. 저는 아직 이 휴대폰을 더 써야 하며, 핸드폰의 본 의무인 전화와 문자, 카톡만이라도 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문에 저는 제 휴대폰의 권리를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하겠습니다. 엄마아빠의 핸드폰은 제가 항상 들고 다니면서 쓸 수가 없기 때문에 그걸 빌려주신다고 해도 제가 사진을 찍기에는 무리입니다.

   사진을 두고 흔히 순간을 담는 예술이라고들 합니다. 그만큼 예상치 못한 순간을 잡아채서 촬영하는 것이 사진에 있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퓰리쳐상 수상작인 왼쪽 사진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음식을 먹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 옆으로 소녀를 먹이로 삼으려는 독수리가 보입니다. 이 사진으로 아프리카의 실태가 전세계에 알려져 구호물품이 쇄도하였고, 사진 속의 아이는 물론 다른 굶주린 사람들까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진을 과연 우리가 연출한다고 해서 찍어낼 수 있을까요? 만약 사진가가 조금만 더 늦게 이곳을 지나갔다면? 좋은 구도를 잡고 좋은 조명을 잡느라 시간을 지체했다면? 아마도 저런 사진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과 풍경과 날씨는 한순간에 지나가고, 그 때가 지나면 똑같은 씬을 다시 찍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간은 일직선으로 흘러갑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없고, 이후에 올 시간을 지금으로 끌어 올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인생의 모든 순간이 더욱 소중하고, 그 소중한 때를 담을 수 있는 사진이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곳에 가서 좋은 포즈를 잡고 찍는 사진보다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훨씬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보이는데, 그러한 순간포착을 위해서는 항상 카메라를 손에 쥐고 애정이 담긴 눈으로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 사진사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사진사를 일반인인 우리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딸이자 누나, 언니인 저입니다! 낄낄! 여러분이 가족 카메라를 구입하는 데 투자하신다면, 여러분은 단 몇십만 원으로 전용 찍사까지 고용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은품, 여러분은 놓치시겠습니까? 만일 제가 비용을 투자받지 못해 온전히 제 용돈으로만 카메라를 구입하게 된다면, 저는 90퍼센트 확률로 삐져서 가족들을 찍기는커녕 수만이만 줄창 찍으며 여러분을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저는 엄마를 닮아 뒤끝이 좀 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최소 석 달동안 여러분은 저의 원망 어린 눈빛을 받아내야 할 것입니다.

   카메라는 가족 간의 추억을 담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추억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정리되지 않은 채로 머릿속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기억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는 대개 물건입니다. 우리는 교복을 보면 학창시절을 떠올리고, 오븐을 보면 같이 구워먹었던 군고구마를 떠올립니다. 카메라를 사기 위해 서영이가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 모두가 그 카메라를 사는 데 동참했다, 그리고 투자했다. 이런 스토리는 그 자체로 한 컷의 추억이 됩니다. 우리는 나중에 우리가 함께 산 카메라를 보면서 이걸 살 때 이런 일이 있었지, 하는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직접 여러분의 모든 순간을 담아냄으로써, 여러분의 인생샷 또한 보장합니다. 백 장 찍다 보면 무조건 한 장을 건지게 되어 있는 게 사진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밀착마크하면서 여러분의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의 사진첩을 열어 본인의 표정을 보십시오. 아마 어색하고 불만족스러운 사진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사진이 잘 찍히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점으로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카메라에 익숙해지고, 카메라가 피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그때부터 인물사진은 놀랍도록 자연스러워집니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 그 모습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일지, 상상해 보셨습니까? 관련해서는 인물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찍을 사진집을 한 번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딸이 태어났을 때부터 시집갈 때까지를 한 권의 책에 담은 전몽각의 <윤미네 집>, 친구의 여섯 살배기 딸을 일 년간 따라다니면서 찍은 카와시마 코도리의 <미라이짱> 등을 추천합니다.

   이번 투자의 특전에는 여러분이 생각지도 않은 부가 서비스 하나가 따라갑니다. 바로 가족 일상 블로그 운영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하루 평균 방문자수 300명 가량의 블로그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자칭) 파워블로거입니다. 저의 경험을 살려 좋은 사진 퀄리티로 우리 가족의 일상을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아시다시피 저는 그림과 글 사진 등에 약간씩의 취미가 있으며 특기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제가 사진 블로그를 운영한다면 사진만으로 불가능한 하루하루의 기억을 저의 그림과 글과 사진으로 되살릴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장점과 특전들을 살펴보시고, 투자를 부디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려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의 길고 긴 글은 내가 엄마아빠에게서 카메라 구입에 필요한 돈을 투자받기 위한 글이다. 마침 오늘 학원에서 반 시간 정도 비는 시간이 있어서 후다닥 완성하였음. 히히 나의 헛소리 실력 녹슬지 않았어.

 제안서는 효력이 있었고 총 삼십만원을 투자받을 수 있었다. 왠지 내가 손해인 듯한 기분도 들지만 그래도 뭐 어때, 인생에 남는 건 사진이고 글이다. (라고 억지로 생각하려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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